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 독립운동 (문단 편집) ==== [[고종(대한제국)|고종]]의 항일과 망명 시도 ==== >1908년 봄 '''[[이위종]]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고종황제의 독립자금 1만 루블(Ruble)을 가지고 [[연해주]]의 [[노보키예프스코예]](Novokiyevskoye)에 도착했다. 한러국경에 가장 가까운 러시아 마을인 연추는 전신국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보의 집결지로서 이미 [[러일전쟁]] 초기부터 한러군사협력 및 항일의병전쟁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에 황제의 자금이 [[안중근]], [[최재형(독립운동가)|최재형]] 등이 참여한 연해주 대한독립군 조직인 同義會 창설에 소요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 >따라서 '''大韓義軍은 1907년 해산된 구한국군대를 계승하여 항일독립전쟁을 이끌어 나갈 주력부대가 됨으로써 [[고종황제]]가 그 최고통수권자가 되었음은 명백하다.''' 대한의군의 설립은 1908년 11월에 구체화된 '''고종황제의 블라디보스톡 파천계획의 전제조건으로서 고종의 연해주 망명정부수립 구상의 일환이었다.''' 1910년 7월 28일 “고종황제로 하여금 노령의 연해주로 조속히 파천하여 망명정부를 세워 독립운동을 영도”하라고 청한 十三道義軍都總裁 유인석과 이상설이 연명으로 올린 상소는 '''항일전쟁을 지휘할 최고 사령관이 고종황제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 >그 결과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의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하얼빈 의거]]는 고종황제를 정점으로 한 대한의군의 항일독립전쟁사의 序幕에 해당되는 바, 이는 1945년까지 항일독립전쟁을 지속시킬 동력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의군의 활동에 정통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지대하다. >----- > - 고종황제와 안중근의 하얼빈의거(1904~1910) 2012, vol., no.73, pp. 95-142 (48 pages) >본 연구는 러일개전(1904)에서 [[헤이그 특사|헤이그특사]]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시기(1909)까지 '''고종황제의 항일독립운동'''을 황제의 강제퇴위(1907)를 정점으로 양 시기로 구분하여 고찰한 것이다. 전기는 개전 이후 단교되었던 [[한러관계]]가 주한공사 파블로프가 지휘하는 [[상하이]]정보국과 고종황제의 비공식 정보협력 채널을 통해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전쟁기간 중 러시아유학생들이 주축이 된 상하이정보국의 한국분과 요원들의 활동은 '''한러간의 정보협력뿐만 아니라 전후 이들이 의병활동에 투신함으로써 고종황제의 항일독립운동에 기여했음을 알 수 있었다.''' 후기는 '''[[헤이그 특사사건]] 이후 고종황제가 측근들을 통한 소극적인 저항보다는 [[연해주]]로 망명하여 망명정부를 통해 직접 독립운동을 지휘하고자 다양한 시도를 했던 시기였다.''' 이를 위해 고종황제와 러시아 당국간의 비밀교섭 창구 역할은 상하이주재 러시아 상무관이던 고이예르와 현상건이 맡았으며 이들은 러일전쟁기 파블로프의 상하이정보국에서 공조했던 전력이 있었다. 따라서 러일전쟁 이후 한러관계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 정보협력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 > - 고종황제의 독립운동과 러시아 상하이 정보국(1904~1909) 81 (2014.12), pp.43-84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150228/69852717/1|[토요판 커버스토리/단독]고종의 ‘항일 스파이’… 러와 손잡고 싸웠다]] [[https://vod.kbs.co.kr/index.html?source=episode&sname=vod&stype=vod&program_code=T2013-0132&program_id=PS-2013116806-01-000&broadcast_complete_yn=Y&local_station_code=00§ion_sub_code=05|고종의 시종무관 김인수 참령의 후손 100년 만에 나타나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망명을 해 국외에서 외교적 수단을 동원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려고 했다. 첫 망명시도는 1990년대 탈냉전 이후 [[러시아]]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밝혀졌다. 1904년 [[러일전쟁]]의 위험이 커지자 고종은 러시아 측에 망명 가능성을 은밀히 타진했다. 이때는 국내의 러시아공사관뿐만 아니라 국외 망명까지 고려한 것이었다.[* 박종효, 2002,101 박종효 편역,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 소장 한국관련 문서요약집』 101쪽] 하지만 이미 전쟁은 막을 수 없는 대세여서 [[러일전쟁]]으로 이어졌고, [[대한제국]]은 일본의 손아귀에 사실상 떨어졌다. 2번째 망명시도는 1907년 강제퇴위당한 바로 그 다음해였다. 당시 일본의 감시를 피해 국외 망명을 시도했고[* 박종효,2002,73 박종효 편역, 『한국관련 문서요약집』 73쪽] 3번째 망명 시도는 1908년 11월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러시아 측 대일협상파에 의해 저지당했다.[* 박종효, 2002, 74 『한국관련 문서요약집』 74쪽] 4번째 망명시도는 고종은 1910년 6월경 다시 연해주 망명정부 수립을 기도했다.[* 외교통상부, 2003, 223~224 외교통상부, 『이범진의 생애와 항일독립운동』, 2003년, 223~224쪽] 즉 고종은 병탄 전에만 4번의 망명시도를 했다가 모두 좌절됐고 한일합방 후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사실 이 망명시도 이전에부터 고종은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러시아와 손을 잡은 상황이었다. 1902년 12월 서울 [[경운궁]]에서 고종은 인사차 찾아온 카를 베베르 전 주한 러시아공사에게 “관립노어학교 졸업생 10명을 러시아 군사학교에 입학시키고 싶다”고 부탁하였고 베베르는 고종 황제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로부터 2년 뒤 고종이 러시아의 상하이 정보국을 통해 특별히 안부를 물었다는 졸업생들이 바로 이들이며 이때 그들 중 9명은 이미 러시아의 정보요원이 돼 있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 한국인 유학생들이 고종의 밀명을 받고 일본에 대항해 러시아 정보요원으로 활약한 사실은 2015년에서야 밝혀졌는데, 이는 최덕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러시아 국립역사문서보관소를 통해 당시 작성된 러시아 정부의 비밀 문건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사실로 당시 일본의 침략에 대응해 대한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공동 항쟁에 나섰음을 보여 주는 역사적 사료로 평가된다. 이 당시 유명한 인물로는 고종의 시종무관이었던 김인수로 김인수도 [[함경도]]로 파견돼 첩보 활동을 벌였는데 이런 반일첩보활동은 [[러일전쟁]]의 패전으로 한러 합작으로 운영되던 상하이 정보국이 1905년 11월 경은 일시로 해체되면서 끝이 나게 됐다. 그러나 일본의 [[간도]] 침략으로 위협을 느낀 러시아가 새로운 인물인 레프 고이예르 상무관을 내세워 1908년 상하이 정보국을 재건함. 당시 비밀 문건 중에는 고이예르가 2차 [[러일전쟁]]이 일어나면 즉각 한국 의병들에게 무기와 병력을 지원하는 계획을 세운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무렵 고종의 심복인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한-러 정보 협력의 대가로 수만 명의 [[의병]]으로 구성된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방안을 러시아 측과 협의하게 됐다. 그러나 이상설의 계획이 러시아의 비협조로 실패하면서 항일의 방식을 놓고 양측의 시각차가 드러났고 러일전쟁 패배 이후 일본과 화해 국면에 들어간 러시아가 한국의 적극적인 무장투쟁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김인수는 대한제국의 참령이자 고종황제의 시종무관이었고, 한편으로 [[러시아]] 국적자이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그의 이러한 신분과 고종의 반일 친러 행보는 당시 일본의 강한 경계를 받았고 이에 [[일본]]은 러시아 측에 '러시아 국적자인 김인수가 [[대한제국]]의 참령으로 복무하는 게 옳지 않다'는 식으로 러시아측에 강하게 항의하게되지만, '빅토르 김이 비록 러시아 국적자이지만 한국 출신이므로 한국군에 복무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러시아는 앞에와 같은 전문을 보내면 쿨하게 씹었고, 이후에도 김인수는 대한제국에서 고종황제의 [[러시아어]] 통역관 겸 시종무관 겸 첩보원으로 계속 활약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에 러일전쟁이 터짐에 따라 결국 러시아로 탈출하게 됐다.[* 이후 [[대한제국]]의 장교이자 고종의 시종무관이었던 김인수는 10년만에 [[러시아 제국]]의 대령으로 나타난다. 중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인수는 [[러시아인]] 여성과 결혼하여서 러시아 제국군의 대령으로까지 진급하게되었으며 김인수 역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연해주]] 지역의 항일의병들과 함께 러시아 제국군 소속으로서 동부전선에 참전하게 됐다. 지금도 러시아에는 김인수 참령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후손들도 할머니(김인수의 손녀)에게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조상님이 [[한국인]]이고 심지어 제정 러시아의 대령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그 이유가 일단 본인들 외모는 100% 백인 외모이고 제정 러시아가 [[러시아 혁명]]으로 무너진 이후에 제정 러시아의 장교이자 간부였던 김인수의 성을 계속가지는 것은 매우 위험했기 때문에 김인수 부인의 성으로 모두 바꾸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것이라고.] 1915년 7월 26일 성낙형 등은 내관 염덕인(廉德仁·또는 염덕신)을 통해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에게 중·독·영·러가 연합해 일본을 공격할 것이 대세라는 등의 보고서를 올리게 했다. 이 보고서를 보고 만족한 고종은 성낙형에게 ‘한중의방조약안’을 가지고 직접 알현하라면서 승낙의 징표로 과거 정조가 사용했던 ‘온여기옥(溫如其玉)’이란 인영(印影·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러나 고종 면담 직전 성낙형을 비롯해 김사준(金思濬)·김사홍(金思洪)·김승현(金勝鉉) 등 다수의 관련자가 검거됨으로써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이 보안법 위반 사건이다. 이때 고종의 아들 [[의친왕]]도 협력했었다. [[고종(대한제국)|고종 황제]]의 해외 망명이 다시 추진된 해는 1918년이었다. 그리고 이 망명은 고종의 마지막 망명시도가 되었다. 이번에는 우당 [[이회영]]이 중심 인물이었다. 이회영의 장남 규학의 아내 조계진(趙季珍)이 고종의 생질로서 고종과 사돈인 데다 [[이상설]]과 [[헤이그 밀사사건]]을 기획했던 경험을 갖고 있어 고종 망명 계획에 나서게 했다. 내적인 조건은 <우당 이회영 약전>에서 “이때는 마침 [[영친왕]] 이은(李垠)과 [[일본 황실]]의 왕녀 [[이방자]](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사의 혼담 결정으로 황제의 고민이 지극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 시종이 (이회영) 선생의 생각을 상주하자 뜻밖에 쾌히 승낙하셨다”고 전하는 대로 국혼(國婚) 문제였다. [[순종(대한제국)|순종 황제]]가 후사가 없는 판국에 왕세자 영친왕이 일본 여인과 혼인한다면 조선 왕실의 맥은 끊기는 것이었다. 이회영과 민영달은 육로 대신 수로를 이용하기로 하고 상하이와 베이징을 저울질하다가 우선 [[베이징]]에 행궁(行宮)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민영달이 행궁 구입 자금으로 5만원(圓)을 내놓자 [[이회영]]은 1918년 말께 이득년(李得年)·홍증식(洪增植)에게 건네 베이징의 동생 [[이시영(정치인)|이시영]]에게 전달하게 했다. 계획은 순조로웠다. 이제 고종이 [[경운궁]]을 나서 일제의 감시를 피해 신하들과 합류하면 됐지만 이때 고종은 갑자기 급서하면서 실패한다. 그리고 고종의 죽음이 독살이었음은 친일 성향의 [[윤치호 일기]]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윤치호는 또 다른 친일파 한진창이 전하는 말이라면서 고종의 시신 상태를 이렇게 설명했다. “완벽한 건강을 누리던 황제가 [[식혜]]를 섭취한 뒤 반시간 만에 격렬하게 몸을 뒤틀면서 죽었다. 황제의 팔다리가 하루 이틀 사이에 엄청나게 부풀어 올라서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 할 정도였다. 혀가 닳아 없어지고 치아는 모두 빠져나왔다. 1피트(30.38㎝)쯤 되는 검은 줄무늬가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윤치호 일기』 1920.10.13.) 일제가 편찬한 순종실록 부록에 이태왕(李太王·고종)의 와병 기록이 나오는 것은 1919년 1월 20일이다. 그러나 병명도 기록하지 않은 채 그날 병이 깊어 [[도쿄]](東京)에 있는 황태자에게 전보로 알렸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우당 이회영 실기는 ‘(고종이) 밤중에 식혜를 드신 후 반 시각이 지나 갑자기 복통이 일어나 괴로워하시다가 반 시간 만에 붕어하셨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망명시도는 아예 헛되지는 않아서 훗날 [[연해주]]는 항일[[의병]]들의 주 거점이 되었으며, 많은 의병 단체들이 연해주에서 활동하게 되는 계기가 되게 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